역사 문화 탐방

백선엽 장군과 박정희 대통령의 에피소드

풍매화1 2012. 10. 23. 19:09

[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44) 박정희와의 약속

[중앙일보]입력 2010.08.03 01:18 / 수정 2010.08.03 09:19

수갑 찬 박정희 눈가가 붉어졌다 … “한번 살려 주십시오”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전등불은 아직 켜지 않은 상태였다. 사무실 안으로는 아직 겨울 석양의 자락이 조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밀려오는 어둠에 서서히 자리를 내주면서 사무실 전체는 다소 무거운 분위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김안일 방첩과장은 말을 이어갔다. “박정희 소령이 마지막으로 국장님을 한번 뵙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꼭 만나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대로 박정희 소령은 남로당 군사책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에 따른 모든 증거가 나와 사형이 확정됐지만 할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대한민국 군대에 파고 든 남로당 조직들을 검거하는 데 공을 세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당신 말대로 한번 박 소령을 만나봅시다.” 내가 그렇게 대답했다. 김안일 소령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걸어나갔다. 잠시 기다렸던 것 같았다. 박 소령이 문 밖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니면 김안일 소령이 계단을 걸어 내려가 지하 1층의 감방에서 박 소령을 데리고 올라왔는지는 기억이 없다.

남로당 군사책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49년 2월 당시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의 결정에 따라 극적으로 살아났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55년 원주의 1군사령부 사령관인 백선엽 대장(왼쪽)이 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왼쪽에서 셋째) 등 예하 사단장의 보직 신고를 받은 뒤 격려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군복을 벗었다가 6·25 전쟁이 터진 뒤 복직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조금 있으려니 내 사무실 문이 열렸다. 당시 나는 사무실 중간에 있었던 응접세트 의자의 중앙에 앉아 있었다. 김안일 소령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박정희 소령이었다. 작은 키에 다부진 인상, 과묵한 표정은 그 전해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14연대 반란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내려갔을 때 만났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많이 핼쑥해져 있었다. 그는 광주에서 서울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검거됐다. 그의 이름은 이승만 대통령이 경찰 치안국장으로부터 건네받아 마지막으로 내게 넘겼던 군대 내의 남로당 조직 명단에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내가 이 대통령으로부터 그 명단을 건네받아 수사에 착수한 뒤 별도의 과정을 거쳐 붙잡힌 것으로 기억한다.

김안일 과장은 아무 말 없이 내게 손짓으로 박 소령을 가리켰다. 김 과장은 내 왼쪽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박 소령은 내 정면에 서 있었다. 그와 나의 중간에는 기다란 탁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거리는 5m쯤이었다.

이미 어둑해진 무렵이었다. 박 소령과 나 사이에는 그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얼굴 표정이 처음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군복 차림이었다. 계급장은 달고 있지 않았다.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그는 사무실 문을 걸어 들어와 응접세트 끝에 섰다. 이어 박 소령은 약간 고개를 숙여 목례를 했다. 그러고서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우선, 그 의자에 앉으시라”고 권했다. 머뭇거리던 박정희 소령이 의자에 앉았다. 나와는 얼굴을 마주 보고서 앉은 것이었다. 자리에 앉은 박 소령은 꼿꼿한 자세였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 않고 끝에 조금 걸터앉은 상태였다. 나는 그가 자리를 제대로 잡고 앉아 나를 마주 바라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 차례였다. 나는 박 소령이 김안일 과장을 통해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보냈던 터라, 그가 스스로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말이 없었다. 나는 계속 기다렸다. 내가 먼저 입을 열 처지는 아니었다. 죽음의 길로 내몰린, 이제 10여 일이 지나면 수색의 처형장으로 끌려갈 박 소령이 먼저 입을 열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왠지 모르게 말이 없었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박 소령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 상황이 10여 초 흘렀던 것 같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이승과 저승으로 엇갈릴지 모를 운명에 놓인 박 소령과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바라보는 시간으로는 꽤 길었다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박 소령의 얼굴이 잠시 움직였다. 어둑해진 사무실이었지만 내 눈도 그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얼굴을 조금 찡그리는 듯하더니 박 소령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간단했다. 아무런 수식이 없었다. “한번 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 말이 박 소령의 입을 통해 나오는 순간, 그의 눈에는 눈물이 도는 듯했다. 눈자위가 붉어지는 것도 내 눈에 들어왔다. 꼭 할 말만을 강하게 내뱉었지만, 그는 격한 감정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의연(毅然)하기도 했지만, 처연(悽然)하기도 했다. 생사(生死)의 갈림길에 선 사람임에는 분명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반드시 해야 할 말 한마디만 얼른 내뱉는 점에서 그는 꿋꿋했다. 비굴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제 운명을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그는 많은 감회에 휩싸여 그를 끝내 이기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줄곧 지켜보면서 잠시 동안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를 살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주 엄혹한 시절이었다. 좌익은 발호했고, 급기야 제주 폭동에 이어 여수와 순천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벌어졌던 때였다. 군대 내부의 좌익을 척결하는 것은 신생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려 있는 중차대(重且大)한 작업이었다.

그 숙군을 지휘하고 있는 내가 사형이 확정된 사람을 살려주는 일에 아무런 생각 없이 앞장설 수 있는 처지가 결코 아니었다. 경무대의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내각과 미 군사고문단, 나아가 일반 시민 모두 이 작업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럽시다…,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요.”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45) 박정희 살리기

[중앙일보]입력 2010.08.04 01:18수정 2010.08.04 09:39

“박정희 형 집행정지”… 마침내 상부의 명령이 떨어졌다

박정희 소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추슬렀던 모양이다. 그의 얼굴은 표정이 별로 없고, 과묵하다는 인상을 주는 상태로 다시 돌아가 있었다. 나는 어쨌든 그와 약속을 한 상태였다. “그렇게 해 보도록 하자”는 말은 이미 내 입에서 흘러나왔고, 그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 소령은 간단하게 목례를 했다. 나는 ‘이제 그만 가도 좋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김안일 방첩과장이 먼저 일어나서 그런 박 소령을 데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를 살리는 작업에 착수해야 했다.

사실 박정희 소령이 사형을 면할 만한 이유는 있었다. 그는 좌익의 발호를 부추겼던 남로당의 군사책이라는 혐의가 분명하게 밝혀진 상태였지만, 실제 활동은 없었다. 김안일 방첩과장과 김창룡 1연대 정보주임이 주도한 조사 과정에서 이는 상세하게 드러났다.

1949년 남로당 군사책 혐의로 사형을 판결 받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백선엽 당시 정보국장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살아난다. 1953년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할 때에도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대장의 도움을 받았다. 이듬해 오클라호마주 포트실 미 포병학교에서 교육을 받던 시절의 박정희 준장(왼쪽)의 모습이다. [중앙포토]
나도 그 점을 알고 있었고, 박정희 소령의 구명을 부탁한 김안일 과장도 이를 설명했다. 나는 그렇다면 박 소령을 살릴 만한 명분은 충분히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당시의 박 소령과 가장 인간적으로 친분이 있던 사람이 김점곤 전투정보·북한과장이었다. 그는 박 소령이 좌익 연루 혐의로 수감된 이래 늘 그가 어떻게 처리될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김점곤 과장은 같은 정보국에서 근무하면서 평소 깊은 친분이 있던 박 소령의 좌익 연루 혐의 사실과 조사받은 내용을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와 역시 친분이 있었던 김창룡 대위를 통해서였다.

김창룡 대위는 당시 1연대 정보주임으로 있으면서 김점곤 과장의 요원을 겸했다. 따라서 김창룡 대위는 김점곤 과장이 알고 싶어 했던 박정희 소령에 대한 조사 결과를 비교적 소상히 전해주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의 기억에 따르자면 박정희 소령은 군에 입문한 뒤 남로당 군사 부문의 책임자였던 이재복에 의해 포섭당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좌익이 일으켰던 10월의 대구 폭동을 이끌었다가 죽은 박 소령의 형 박상희 또한 이미 좌익에 깊이 몸을 들여놓은 상태였다.

김점곤 과장이 47년 춘천 8연대에 근무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당시 8연대 독립중대 중대장, 박정희 소령은 그 밑에서 소대장으로 근무를 했다. 김 중대장에게 박정희 소대장은 여러 차례 신세를 졌다. 술을 자주 얻어 마셨던 것이다.

어느 날 하루, 박정희는 “오늘은 내가 술 한잔 내겠다”고 제의했다. 박정희는 이어 “산판(벌목업)을 해 돈을 많이 번 삼촌이 있는데 춘천에 온 김에 저녁을 모시겠다고 한다”고 했다는 것. 그날 저녁에 나타난 사람이 남로당 군사 부문 최고 책임자였던 이재복이었다. 그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담비 목도리에 최첨단 유행의 비싼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이재복은 김 중대장과 박정희, 뒤늦게 연락을 받았던 연대장 원용덕 대령과 함께 술자리를 벌였다.

원 대령은 술 몇 잔이 돌아 취기가 오르자 갑자기 호통을 쳤다고 했다. “야, 정희야. 너 상놈이구나!” 박정희는 그때 정색을 하고 대답을 했다. “내가 가난한 집에서 자랐지만, 결코 상놈이 아닙니다.” 이 말에 원 대령이 “그런데 (이재복이) 삼촌이라면서 왜 성이 다르냐”라고 캐묻자, 당황한 박정희가 “외삼촌이라 그렇습니다”고 얼버무렸다는 것이다.

김점곤 과장은 그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박정희가 남로당에 포섭된 상태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고 회상했다. 나중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 당시 이미 박정희는 이재복에 의해 깊이 남로당 조직에 들어가 있었던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남로당에서 중요한 군사책을 맡은 것은 분명하지만 정보국의 조사 결과 그가 다른 군인들을 포섭하고 조직에 끌어들였던 활동은 나타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그가 군대 내부에서 남로당 조직 및 포섭 활동을 한 흔적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박 소령은 명동 증권거래소 지하 감방에 붙잡혀 있는 동안 자신이 아는 군대 내 남로당 조직을 수사팀에 알려줬다. 이런 점에서 박 소령의 구명은 명분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를 사형 판결 상태에서 형 집행정지로 돌리려면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군 지휘계통을 밟아 이응준 총참모장의 재가를 얻어내야 하고, 당시 국군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미군의 양해도 얻어야 했다. 나는 그에 관한 검토서를 작성토록 했다. 정해진 서류를 작성해 그를 구명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한편으로는 나와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던 미 고문관 리드 대위를 거쳐 군사고문단장인 로버트 준장에게도 동의를 받아야 했다.

로버트 준장은 즉시 답을 보내왔다. “백선엽 대령에게 일임할 테니, 알아서 판단하라”는 내용이었다. 남은 것은 국군 지휘부의 재가였다. 그러나 나름의 절차를 밟다 보니 시일이 하루 이틀 미뤄졌다.

정확하게 며칠이 지났는지는 모른다. 10여 일이 흘렀을까. 상부로 보낸 서류가 왔다. 박 소령 형 집행정지를 허락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10여 일이 박 소령에게는 커다란 고통이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운명이 어떻게 갈릴지 모르는 상태에서의 그 기다림이란 감내키 어려운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다행이었다. 이제 그를 풀어주는 절차가 남았다. 나는 박 소령을 직접 수사하는 데 앞장섰던 두 사람을 사무실로 불렀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