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문화 탐방

땅굴

풍매화1 2012. 10. 19. 22:01

 

중요 군전략지역인 고랑포 방면, 철원 방면, 문산 방면을 목표지점으로 하여 제1·제2·제3의 땅굴을 굴착해 오다가 발견되었다.

 

제1·제2땅굴의 경우 시간당 3만 병력을 침투시킬 수 있으며, 야포 또는 전차를 통과시킬 수 있다. 전면적 기습전과 방위선 후방공략이라는 전술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북한의 ‘땅굴사업’은 2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땅굴작전은 이른바 김일성의 ‘9·25교시’에 의하여 1971년 9월 25일 당의 대남공작 총책이던 김중린(金仲麟)과 북한군 총참모장 오진우(吳振宇) 등에게 “남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속전속결전법을 도입하여 기습전을 감행할 수 있게 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데서 개시되었다.

 

북한의 각 군단별로 땅굴작전이 수행되었고, 이러한 작전은 1972년 이후 남북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암암리에 추진되었다. 땅굴들의 발견경위와 규모는 다음과 같다.

 

1974년 11월 15일 오전 7시 35분에 처음으로 발견되어 이 날 밤 11시 심야에 주한 유엔군사령부 대변인인 대령 우드사이드에 의하여 즉각적으로 그 전모가 발표되었다. 땅굴이 발견된 장소는 경기도 고랑포 동북방 8㎞ 지점인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의 남방 약 1,200m 지점이며 휴전선 남방한계선을 불과 800m 남겨 놓은 곳이다.

너비 약 90㎝, 높이 1.2m의 규모에 벽은 조립식 콘크리트이며 천장은 콘크리트 슬래브였다. 220V·60W의 전선, 전등시설이 되어 있었으며, 전체 길이 3.5㎞의 땅굴 안에는 레일이 깔리고 궤도차(軌道車)가 놓여 있었다.

북한은 지하 평균 45m의 지점을 굴착하여 왔으며 곳곳에 궤도차의 회전장(回轉場)이 있었다. 벽에는 ‘1974년 4월 22일’, ‘1974년 9월 6일’, ‘관측소가 보임.’ 등의 글이 적혀 있었다.

유사시 전술능력은 1시간에 1개 연대 이상의 무장병력을 통과시킬 수 있다. 궤도차를 이용할 경우 포신(砲身)의 운반과 중화기의 운반에도 충분히 이용될 수 있는 규모이다. 발견 당시 땅굴은 지하 46㎝의 얕은 지점이었으며 군사도발을 즉각 개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군사분계선 남쪽을 정기적으로 순찰하던 민경대원(民警隊員)이 이 지점에서 증기가 솟아오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을 때 북한군은 약 300발에 이르는 총격을 가해 왔다.

우리 정부에서는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하여 북한측에 땅굴현장의 공동조사를 제의하였으나, 북한측은 평양방송을 통하여 “남한에서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는 비방과 함께 이를 거부하였다.

우리 현장조사반은 위험을 무릅쓰고 단독수색에 나섰고, 그 해 11월 20일 북한이 매설한 폭발물에 의하여 국군장교 1명과 미군장교 1명이 순직하고 6명이 부상하는 참변을 겪었다.

 

제1땅굴이 발견된 지 4개월 뒤인 1975년 3월 19일, 중부전선 군사분계선 남방 900m 지점인 철원 북방 13㎞ 지점에서 한국측의 시추탐사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이곳은 ‘백마고지’·‘피의 능선’·‘김일성고지’ 등 격전지가 인접한 중요 전략지역이다.

“깊은 땅 속에서 들릴 듯 말 듯한 폭음소리가 들렸다.”는 한 민경병사(民警兵士)의 보고에 따라 전문가 20여 명과 기술공병이 참여하여 지하암벽을 뚫는 땅굴탐색작전을 폈다.

49개 소의 추암공(錐巖孔) 가운데 제39호 추암공이 지하 51m 지점에서 너비 2m 정도의 암층무반응동공(巖層無反應洞空)이 있음을 감지하고 지하촬영용 특수원추형 카메라(25개의 고성능 렌즈가 부착됨)에 의하여 확증을 잡았다.

땅굴을 조사한 결과 규모는 너비 2.2m, 높이 2m, 전체 길이 3.5㎞로서 군사분계선 남방 1,100m지점까지 굴착되어 있었다. 지하 평균 50m의 지점으로부터 산밑을 통과하는 곳은 지하 160m나 되는 지점을 굴착하여 내려왔다.

지하수가 땅굴 속에 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약간의 경사를 이루는 기술공법을 쓴 흔적이 역연하고, 많은 병력이 집결할 수 있는 광장이 마련되어 있으며, 땅굴의 남쪽 출구는 우리쪽 남방한계선 후방에서 세 군데로 갈라져 나가게 되어 있었다.

전술능력면에서 보면 시간당 약 3만 명의 무장병력이 통과할 수 있고, 야포와 차량의 통과는 물론, 땅굴의 마무리공사가 이루어졌을 경우에는 전차의 침투도 가능하다. 제1땅굴의 약 5배에 달하는 크기이다.

 

1978년 10월 17일 판문점에서 4㎞, 군사분계선 남방 435m 지점에서 땅굴수색 시추공사를 하던 중, 한 시추공에 박혀 있던 PVC파이프가 튀어나오고 지하수가 공중으로 12m 가량 솟아오르면서 발견되었다.

제3땅굴은 임진강 하구에서 판문점을 향하여 남북으로 그어진 군사분계선의 서쪽 1,200m 지점으로 추정되는 북한측 지역의 입구로부터 전체길이 1,635m를, 지하평균 73m의 암석층을 굴착하여 왔다.

너비 2m, 높이 2m로 제2땅굴과 같은 구조인 아치형의 대규모 땅굴이다. 남쪽 출구는 세 갈래로 나누어지고 전술능력으로 보면 시간당 무장병력을 3만 명이나 통과시킬 수 있다.

월남 귀순자 김부성(金富成:북한노동당 연락부 소속 소좌대우)과 김대윤(북한군 소위)의 증언에 따르면 땅굴은 ‘9·25교시’에 의하여 착수된 것으로, 자신들이 “1972년 1월부터 땅굴을 파기 위한 측량에 나섰고 9월부터는 직접 컴프레서요원으로 땅굴작업에 동원되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땅굴작업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에 합의를 보고 그 해 8월 30일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을 비롯하여 제7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을 거쳐 1973년 8월 28일 남북대화 중단선언을 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고 추정된다.

{파주시 임진각 관광지에서 DMZ 투어 티켓으로 관람 가능하다}

 

땅굴과 관련하여 숨겨진 북한의 전략적 기도는, 첫째 전면전을 전개할 때 대량병력의 신속한 이동으로 우리의 중요 전략지역을 강타, 점령하고, 둘째 사회혼란이나 무장폭동이 일어났을 경우 그들의 게릴라부대인 ‘특수8군단’과 ‘경보병부대’를 침투시켜 국가전복을 획책하며, 셋째 대남간첩의 침투와 불순세력에 대한 무기공급 등이라고 판단된다. 1990년 3월 3일에는 강원도 양구 북방에서 제4땅굴이 발견되어 북한의 끊임없는 남침야욕이 확인되고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96.1.5,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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