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문화 탐방

백제인의 숨결 사비성 부여를 가다

풍매화1 2012. 2. 18. 15:39

부여라 하면 한국민의 80% 이상이 백제의 수도였던 곳임을 알고 있다. 중학교 이상을 졸업한 사람이면 부여는 금강의 하류에 있는 충남의 군 소재지로 알고 있을 정도로 너무나 잘 알려진 곳이다. 우리 나라의 250여개가 넘는 시ㆍ군 중 100여 년 이상 한 나라의 수도였던 곳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정도이다. 전국의 관광객이 부여를 찾아와 낙화암을 보고, 국립부여박물관을 보고 간 사람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이처럼 잘 알려진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당나라 군대에 의하여 멸망되었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부여는 백제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명칭이 바뀌지 않은 오랜 군으로서의 역사를 또한 가지고 있다. 신라의 수도 계림은 신라가 멸망한 후 경주라는 명칭으로 바뀌었지만 부여의 명칭은 백제시대 이래 그대로 지금까지 군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부여라는 나라는 우리 나라에서 고조선 다음으로 가장 오래 전에 세워져 4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나라이다. 결국 고구려에 통합되어 그 역사를 잃어버린 나라의 하나이다. 이 부여에서 금와왕이 동쪽으로 옮겨와 지금 길림성 연길 지방에 동부여가 되었고, 그 일부가 다시 내려와 졸본성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그리고 그 지배층 일부가 다시 한강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하였고, 백제는 한강유역의 위례성에서 고구려의 팽창정책에 밀려 공주로 천도하였다. 무령왕이 중흥을 이룩하기 위하여 천도의 계획을 하였고, 그 아들 성왕대에 수도를 부여로 옮겼다

부여는 공주와 함께 백제문화의 흔적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좋은 의미에서 부여는 완성된 백제의 문화모습을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백제 패망의 아픔도 고스란히 전해 준다. 부여에는 왕궁지와 수많은 불교유적들, 왕릉유적, 그리고 부소산과 궁남지 등 발전했던 백제문화가 밀집되어 있다. 그리하여 부여시대 백제로부터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았던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기들의 문화 원류를 보기 위해 줄을 이어 찾아든다.

그러나 이곳에는 이같이 화려한 백제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낙화암의 백제여인들이나 황산벌에서 산화한 한 맺힌 백제최후를 지킨 영령들의 숨결도 함께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당연합군의 말발굽아래 무참히 도륙 당하고 치욕적인 굴복을 겪어야 했던 백제 최후의 현장인 부여.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부소산에 올라 백마강을 바라보며 백제의 애환을 노래한다.

공주로 천도한 뒤 계속 불안했던 백제왕실은 무령왕과 성왕대에 이르러 어느 정도 원상을 회복, 보다 강성한 왕국 건설의 웅지를 가지고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천도하였다. 부여로 천도한 백제는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호남평야지대의 경제기반과 진취적인 대외 활동을 통해 이 같은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한다. 그리하여 백제역사상 부여시대(538~660년) 123년은 백제문화의 최전성기를 구가하였을 뿐아니라 삼국문화중 최고의 예술혼을 피우게 되었던 곳이다. 또한, 일본고대문화 형성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곳으로 이곳 부여에서는 백제의 역사문화를 찾기 어려워도 일본 지방에서 백제의 아름다운 문화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대외 영향력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정림사지5층석탑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석탑은 익산(益山)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石塔)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始祖)라고 할 수 있다.

목조건물의 가구(架構)를 모방하고 있으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가 장중하고 명쾌한 기풍을 풍겨준다. 초층탑신(初層塔身) 4면에는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멸한 다음 그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넣었으나 이는 탑이 건립된 훨씬 뒤의 일이다.
이곳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정림사명(定林寺銘)이 들어 있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의 석탑으론 유일하다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모습이 언제봐도 경이롭다

 

정림사의 회랑을 복원하려고 기단의 초석을 마련한듯 보인다

 

정림사지 박물관안에 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으며 영상을 관람하면 정림사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부소산성 안에 위치한 낙화암......

부여 백마강변의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진 곳이라 한다. 『삼국유사』, 『백제고기』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이었다고 하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낙화암 꼭대기에는 백화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에 세운 것이다.

 

고란사

고란사는 고려시대 때에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백제여인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지어진 절이다. 백제시대에는 이곳에 절이 아닌 정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절 이름은 뒤쪽 바위에서 자라는 고란초에서 유래하였다. 고란사는 법당, 요사채, 범종각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재의 법당 건물은 1959년 은산면 각대리에 있던 숭각사 건물을 옮긴 것이다.

고란사는 남아 있는 유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절로 보고 있다. 특히 연꽃 무늬가 새겨진 2개의 주춧돌은 대표적인 고려의 유물

부여 부소산 낙화암 아래에 있는 고란사 바위틈에서 솟아 나오는 약수에는 어린이가 된 할아버지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아득한 옛적 소부리의 한 마을에 금슬좋은 노부부가 살았는데 늙도록 자식이 없어 할머니는 늘 되돌릴수 없는 세월을 한탄하며 다시 한번 회춘하여 자식 갖기를 소원했다.

그러던 어느날 할머니는 일산(日山:금성산)의 도사로부터 부소산의 강가 고란사 바위에는 고란초의 부드러운 이슬과 바위에서 스며나오는 약수에 놀라운 효험이 있다는 말을듣고 그 다음날 새벽 남편을 보내 그약수를 마시게 하였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다음날 일찍 약수터로 찾아가보니 할아버지는 없고 웬 갓난아이가 남편의 옷을 입고 누워있어 깜짝 놀랐다.

할머니는 아차했다. 도사가 한잔 마시면 삼년이 젊어진다는 말을 남편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며 갓난아기를 안고 집에 돌아와 고이 길렀는데 후에 이 할아버지는 나라에 큰공을 세워 백제시대 최고의 벼슬인 좌평에 올랐다고 한다.

**고란사 아래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이용할수 있는데 겨울철엔 최소 7명이 되어야 유람선을 탈수 있다

 

궁남지

부여읍 남쪽에 위치한 백제시대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이 연못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무왕조(武王條)에 "3월에 궁성(宮城)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였으며, 물가 주변의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떴다"라고 되어 있다. 사실, 백제에서 왕궁 근처에 연못을 만드는 전통은 이미 한성시대(漢城時代)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한성시대에 조영된 왕궁에 딸린 연못은 아직 발굴된 바 없어서 그 실체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비해 웅진(熊津)시대의 왕궁이었던 공산성(公山城) 안에서는 당시의 것으로 판단되는 연못이 왕궁지(王宮址)로 추정되는 건물지(建物址)와 함께 발굴되었다. 공산성에서 발굴된 이 연못은 바닥이 좁고,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원형의 연못인데 직경 7.3m, 바닥 직경 4.8m, 그리고 깊이 3m의 크기를 보이고 있다. 이로써 보면 백제에서 왕궁 근처에 연못을 만드는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성시대와 웅진시대의 연못은 그자체만 확인될 뿐 여기에서와 같은 삼신산(三神山)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삼신산은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州山)을 말하는 것으로,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삼신산(三神山)에는 신선(神仙)과 불로초(不老草)가 있고, 황금(黃金)과 백은(白銀)으로 된 궁궐도 있는 일종의 이상향이다. 따라서 기록대로 이 궁남지의 한가운데에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한 조산(造山)이 있었다면 이는 중국의 진-한대(秦-漢代)부터 신선사상에 근거하여 삼신산을 조성하였던 것이 백제의 왕궁 조원(造苑)에 처음 들어온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궁남지에 대한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무왕 37년조에는 "8월에 망해루(望海樓)에서 군신(群臣)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고, 다시 39년조(年條)에는 "3월에 왕이 왕궁(王宮)의 처첩(妻妾)과 함께 대지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로써 볼 때 이 궁남지는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붙여진 이름은 아니고, 백제시대에는 단지 대지라고 불리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뱃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그 규모가 컸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규모가 얼마나 컸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현재는 1만평 정도만 남아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약 3만평 정도가 연못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크기는 발굴조사를 통해서 만이 확인될 수 있을 듯하다.

이 궁남지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또 다른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의자왕(義慈王) 15년조에 보이는 《"2월에 태자궁(太子宮)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라는 기록이다. 망해루(望海樓)나 망해정(望海亭)에서 대지(宮南池)를 바라보면 바다와 같이 시원한 느낌을 받았을 터이고, 이렇게 바다와 같이 큰 연못을 왕궁 근처에 만드는 것이 백제가 처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라의 경우 문무왕대(文武王代)에 안압지(雁鴨池)를 만들고, 그 안에 삼신도(三神島)를 조성하며, 주변에 임해전(臨海殿)을 세우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백제의 궁남지와 같은 개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백제의 조원(造苑) 기술은 삼국 중 으뜸이었으며, 통일신라의 조원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문화재현단지

국내 최초로 삼국문화의 한 축인 백제시대의 건축 양식과 역사 문화를 체험 할 수 있는 백제문화단지가

지난 9월 17년간 충남 부여군 합정리 일대에 3.294 제곱미터에 6900여 억 원을 투자 하여 재현하여 문을 열었다

백제문화단지는 찬란했던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1994년부터 2010년까지 총 17년간의 역사적인 대장정 끝에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 일원에 6.904억원을 투자하여 백제 왕궁인 사비궁과 대표적 사찰인 능사 계층별 주거문화를 보여주는 생활문화마을 .개국 초기 궁성인 위례성,묘제를 보여주고 있다

 

관람료는 9천원으로 백제역사문화관 관람 포함 금액이다

다소 비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관람료 인하를 위한 계획 수립중이라니 기대해 봐야겠다

워낙에 넓어서 백제문화단지를 다 돌아보려면 적어도 두시간은 걸릴것 같다

해설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해설을 함께 듣는것이 도움이 된다

 

                       백제문화단지에는 위례성, 제향루, 고분공원, 생활문화마을, 사비궁, 능사, 백제역사문화관, 정양문, 휴게실이 있습니다.

정문인 정양문...

사비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사비궁의 가장 중심건물인 천정전이 있는 곳으로 경복궁의 근정전과 같은 나라의 큰 행사를 담당하는 치조 공간이다

 

 

바닥에 깔린 화려한 용무늬의 벽돌이 백제궁의 특성을 말해주고 있다

백제 왕이 앉아 있던 어좌이다

 

사비궁의 회랑의 모습이다

회랑은 궁궐과 사찰에만 있는 공간이다

 

아래와 같은 건축양식이 하앙 주심포식 건축양식이라 한다

 

백제의 사찰 능사

 

능사는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백제 왕실 사찰이다

능사의 웅장한 5층 목탑이 눈길을 끈다

 

                        

 

 

목탑 안에 모셔져 있는 삼존불로 군수리사지에서 출토된 불상과 서산마애삼존불 중에 한분등 각기 다른 세분의 부처님을 모셔

놓은것이다

 

백제 역사문화관에서는 백제인의 의상을 입어보는 체험을 무료로 할수 있다

                                  

 

 

2012년 2월 17일..........

'역사 문화 탐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라산역  (0) 2012.10.19
땅굴  (0) 2012.10.19
강화마니산에 오르다  (0) 2011.04.17
수원화성  (0) 2011.04.10
둘째날 경주 남산에 오르다  (0) 2010.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