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왕릉

헌.인릉

풍매화1 2012. 2. 18. 14:14

헌.인릉은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다

지하철 3호선 양재역으로 나와 성남 방향 버스 이용, 헌인릉 하차.
버스 서초09,4421,4422,4423,9410,9411,9412 등을 이용하여 헌인릉에서 하차 5분 정도만 걸어가면 된다

헌.인릉은 위의 능역까지 올라가 볼수 있는데 해설사가 헌릉에 계셔서 헌릉에 올라가면 설명을 들을수 있다

 

 

 

 

조선 3대 태종(太宗) 헌릉

 

인릉

 

조선왕조 제23대 임금인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의 능.

 

사적 제194호.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1834년 순조가 죽자 파주 교하의 장릉(長陵) 국내(局內)에 초장(初葬)했다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1856년(철종 7) 지금의 자리인 헌릉(獻陵) 오른쪽으로 이장했으며, 다음해 왕비가 죽자 합장했다.

능제도는 외형상 일반적인 단릉(單陵)과 같이 혼유석(魂遊石) 1좌만을 두고, 2실(室)로 합장했으며, 장명등(長明燈)은 영릉(英陵)의 제도를 따르고 있다. 석인(石人) 조각은 4등신으로 머리가 어깨 위로 나오고 하반신이 더 길어진 형태이다.

능의 상설은 곡장(曲墻) 3면, 난간석 12칸, 혼유석 1개, 장명석 1개,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마석(馬石) 2쌍, 양석(羊石) 2쌍, 호석 2쌍, 정자각, 수라청, 망료위(望燎位), 표석, 홍살문, 재실 등이 있다. 헌릉과 더불어 헌인릉으로 불린다.

                       

인릉은 봉분에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만 두른 왕과 왕비의 합장릉임에도  혼유석이 하나이다

릉 가까이엔 갈수가 없어 측면 사진만 찍어본다

 

참도는 이도로 이루어져 있다

참도 옆에 놓여진 이곳이 배위이며 임금이 능행차시 절을 하던곳이다

 

 

헌릉

3대 태종(太宗)

  • 능호 : 헌릉
  • 위치 :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42
  • 지정번호 : 사적 제194호
  • 조성시기 : 1420년(세종2) 9월 17일 (원경왕후 하관일)
  • 능의구성
  • 헌릉은 3대 태종과 원비 원경왕후의 봉릉이 같은 언덕에 조영된 쌍릉 형식으로,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이다. 병풍석의 규모와 확트인 전경, 정자각 중심의 제향공간과 능침공간 사이의 높이 차이 등 초기 조선 왕릉의 위엄성을 잘 드러내주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헌릉의 능 앞 석물들은 망주석, 혼유석, 장명등은 1쌍이고 양석, 호석은 각각 4쌍, 문무인석과 마석은 각각 2쌍씩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왕조의 현릉(玄陵)과 정릉(正陵) 제도를 기본으로 한 것이며 조선시대에서는 가장 웅장한 배치 방법이다.
  • 헌릉이 지닌 조선 초기 왕릉으로서의 특성을 두 가지 꼽자면 소전대와 상석 아래 놓인 고석의 개수를 들 수 있다. 정자각 북서측에 있는 소전대라고 하는 석물은 제례의 마지막 절차인 지방을 불사르는 시설로 태조 건원릉과 이곳 헌릉에서만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석물이다. 한편 봉릉 앞 상석 아래에 놓인 고석의 개수가 5개인데, 이와 같이 고석이 5개인 능은 태조의 건원릉, 태종의 헌릉으로 모두 조선 초기 상설제도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헌릉에는 불교 요소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법석은 물론, 원찰의 설립을 금하였다.
  • 능의역사
  • 원경왕후가 1420년(세종 2) 7월 10일 수강궁(창경궁) 별전에서 태종보다 일찍 세상을 뜨자, 태종의 명으로 같은 해 9월 17일 대모산 기슭에 건좌손향으로 왕후의 능을 조영했는데, 억불정책으로 원찰을 세우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22년(세종 4) 태종이 승하하자 아들 세종은 같은 해 9월 6일 어머니 원경왕후의 능 옆에 봉릉을 따로 만들어 아버지를 모시고 난간으로 연결하여 쌍릉을 조성하고 곡장을 둘렀다.
  • 능원에는 두 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손상된 원래 신도비와, 1695년(숙종 21) 하나 더 증설하여 세운 것이다. 왕릉의 신도비는 태조의 건원릉, 정종의 후릉, 태종의 헌릉, 세종의 영릉 때까지 세웠다가 그 이후에는 완전히 폐지했는데, 현재 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과 헌릉에만 볼 수 있으며 세종의 영릉 신도비는 서초구 내곡동 원래의 터에 묻혀 있던 것을 1973년에 발굴하여 현재의 청량리 홍릉동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입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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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무인석은 다른 릉과 달리 각각 두쌍씩 한쪽에 무인석 2 문인석 2기씩 배치되어 있으며 문.무인석의 얼굴이 각기 다르며 각각의 말을 대동하고 있는 모습이다

     

     

     

     

     

     

     

    제사 지낸후 축문을 불태우는 곳으로 예감 또는 망료위라 불린다

     

    참도는 신도와 어도가 구분되어 있지 않다

    정자각의 신계가 낮은것이 특징이다

    정자각 뒤로 강으로 이어지는 참도가 있다

     

    비각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손상되어 1695년(숙종 21) 다시 세웠다. 변계량(卞季良)이 찬(撰)하고, 박태상(朴泰尙)이 기(記)했으며, 이덕성(李德成)이 글씨를 쓰고, 홍수주(洪受疇)가 전(篆)했다

     

     

     

     

    신도비- 죽은 이의 평생 행적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 비석.

    신도는 묘 앞에서 입구까지 낸 길을 말한다. 중국의 경우 한대(漢代)부터 성행했는데, 처음에는 석주(石柱)를 세우거나 간단한 제액(題額)을 써서 표시했을 뿐이고 묘비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한 것은 진(晉)·송(宋)대에 들어서였다.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부터 묘비를 세우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신도비를 세우는 것이 성행했는데, 태조의 능인 건원릉(建元陵),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 등 왕릉 앞에 세워진 것이 있다. 사대부의 경우에도 생전에 세운 공로나 인품을 기록하여 비석을 크게 세우는 사례가 많았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춘 형식이나 귀부는 생략하고 이수만 갖추기도 했다.

    태조, 태종, 세종 이후로 왕릉에선 신도비가 없어지고  사대부의 묘에서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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