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문화 탐방

둘째날 경주 남산에 오르다

풍매화1 2010. 11. 28. 22:45

남산은 서라벌의 진산(鎭山)이다. 북의 금오봉(金鰲峰, 468m)과 남의 고위봉(高位峰, 494m)을 중심으로 동서 너비 4km, 남북 길이 10km의 타원형으로, 한 마리의 거북이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엎드린 형상이다. 골은 깊고 능선은 변화무쌍하여 기암괴석이 만물상을 이루었으니 작으면서도 큰 산이다.



남산에는 온갖 전설이 남아 있고,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역사의 산이며, 선조들의 숨결이 가득한 민족문화의 산실이다. 이 산 주변에는 신석기 말기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고, 신라시조 박혁거세거서간이 탄강(誕降)한 나정(蘿井)과 초기 왕궁, 나을신궁(奈乙神宮), 왕릉이 즐비하며, 도성(都城)을 지켜온 남산신성(南山新城)을 비롯한 4곳의 산성과, 망국의 한이 서린 포석정지(鮑石亭趾)가 있어 남산은 실로 신라 천년의 역사와 함께 한 산이라 할 수 있다.

남산에는 많은 불상과 탑들이 남아 있다. 그 대부분은 석탑(石塔)과 석불(石佛)로서 특히 마애불(磨崖佛)이 많다. 이처럼 많은 유물들이 돌로 만들어진 데에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기도 하지만,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신앙된 바위 신앙과도 관련이 깊다.

아득한 옛날부터 남산 바위 속에는 하늘나라의 신들과 땅위의 선신(善神) 들이 머물면서 이 땅의 백성들을 지켜준다고 믿 었으며,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산 속, 바위 속의 신들이 부처와 보살로 바뀌어 불교의 성산(聖山)으로 신앙되어 왔다.이러한 신앙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비파바위(琵琶巖)의 부처님이 망덕사(望德寺)의 낙성재(落成齋)에 누추한 옷차림으로 참석하였는데, 왕이 그 누추함을 업신여기자, 왕을 꾸짖고는 진신석가(眞身釋迦)의 모습으로 바뀌어 홀연히 남산 바위 속으로 숨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누추한 승복을 입고 광주리에 물고기를 담아 들고 나타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경흥국사(景興國師)의 제자가 나무라자, 말을 타며 호사스럽게 지내는 경흥국사를 크게 꾸짖고는 다시 남산 속으로 숨어버린 문수보살의 이야기도 있으며, 충담(忠談)스님은 삼화령(三花嶺)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다공양(茶供養)을 올린 후 경덕왕(景德王)에게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올려 군신(君臣)과 백성이 서로의 본분을 다할 때 나라가 태평하다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설화들은 곧 남산과 남산 바위 속에는 부처와 보살이 머물면서 권세있는 자나, 존경받는 지식인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는 산에서 내려와 호되게 꾸짖고 가르침을 주고는 다시 산 속, 바위 속에 숨었다가, 백성들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내려와 보살펴 준다고 신앙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또한 예술로 승화되고 표현되어, 골마다 절이 세워지고, 바위마다 불상(佛像)이 조성되며, 수많은 탑이 세워져 불국토(佛國土)를 이루었다.

남산에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7세기 초에 조성된 동남산 부처골 감실여래좌상(佛谷龕室如來坐像)은 투박한 시골 할머니가 돌로 만든 집 속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고즈넉한 주변 분위기와 어울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안온하게 해주는 한국 최고(最古)의 감실불(龕室佛)이며, 7세기 중엽의 장창곡 석조미륵삼존불의상(石造彌勒三尊佛倚像)과 선방곡 석조여래삼존불(石造如來三尊佛)은 티없이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웃음으로 잘 알려져 있다.

7세기 후반에 불세계(佛世界)를 만다라적(曼多羅的)인 기법으로 새겨 놓은 탑곡 마애조상군(磨崖造像群)은 사방의 불보살과 비천(飛天)들이 시시각각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나타나는 웃는 모습들은 가히 환상적인 불세계를 표현하고도 남음이 있다. 삼국통일후 남산은 불보살이 머무는 신령스런 성산(聖山)으로 신앙되어 더욱 많은 탑과 불상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에 사방불(四方佛)을 더하여 조성한 칠불암(七佛庵) 마애조상군은 심산궁곡 바위 절벽을 부처님들이 머무는 하늘 나라로 보고 험준한 산등성이에 절을 세운 용기와 큰 바위를 쪼아 대불(大佛)들을 조성하여 화엄세계(華嚴世界)를 구현해 낸 신앙의 열정에는 그저 감격 할 뿐이다.

조선초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집필한 용장계곡 용장사지(茸長寺址)의 석조삼륜대좌불(石造三輪臺坐佛)은 자연석 바위를 하대석으로 삼고 둥글둥글한 대좌를 삼단으로 놓아 그 위 연꽃 방석에 부처님을 모셨으니 바로 수미산(須彌山) 위 도솔천(兜率天)의 미륵보살을 모신 것이 아니겠는가?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불상은 유가종(瑜伽宗)의 대덕(大德)이신 대현(大賢)스님께서 염불하면서 돌면 이 미륵상 또한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남산 전체가 마애불의 보고(寶庫)이지만, 특히 냉골(삼릉계곡)은 마애불이 많다. 입가에 방글방글 미소를 머금은 채 금방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마애관음보살입상(磨崖觀音菩薩立像), 다듬지 않은 넓은 바위 면에 사바세계(裟婆世界)에서 설법하고 있는 석가삼존불과, 극락으로 왕생(往生)하는 중생을 마중 나오시는 신비스런 모습의 내영아미타여래(來迎阿彌陀如來)를 한 폭의 그림으로 새긴 선각육존불(線刻六尊佛), 얼굴은 원만상으로 조각하고 몸은 억센 선으로, 연화대좌는 부드럽고 희미한 선으로 처리하여, 기도하는 중생을 위하여 바위 속에서 모습을 들어내는 듯한 높이 6m의 상선암 마애대좌불(磨崖大坐佛) 등 남산 전체가 불보살의 세계를 옮겨 놓은 듯하다.

부처님 나라를 그리는 간절한 신앙은 탑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용장계곡의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200여m가 넘는 높은 바위 봉우리를 하층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상층기단을 쌓고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을 얹어 삼층석탑을 쌓았으니 하층기단인 바위산은 바로 8만 유순(由旬)이나 되는 수미산이 되는 것이오. 탑 위 푸른 하늘이 수미산정(須彌山頂)의 부처님 세계가 되니, 서라벌 벌판은 부처님이 굽어보는 복된 땅이 되는 것이다.위 산을 기단으로 삼은 탑은 최근 복원한 잠늠골 삼층석탑과 늠비봉 오층석탑에서도 나타날 뿐만 아니라, 초기 왕궁지였던 창림사지(昌林寺址) 삼층석탑과 남산리 사지(寺址) 서삼층석탑에 이르러서는 상층기단부에 팔부중상(八部衆像)의 조각으로 나타나고 있다. 팔부중상은 사천왕(四天王)의 장수(將帥)이니 탑의 기단부가 수미산이 되는 것이다.

남산에 있는 불교유적의 가치는 자연과의 조화와 다양성에 있다. 편편한 바위가 있으면 불상을 새기고, 반반한 터가 있으면 절을 세우고, 높은 봉이 있으면 탑을 세우되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조성하였다. 비록 바위 속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믿고 있어도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에 적정하지 않으면 불상을 새기지 않고 예배하였으며, 절을 세워도 산을 깎고 계곡을 메운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신라인들은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바위 속에 있는 부처를 보고, 정(釘)을 들고 바위 속에 숨어 계신 부처님을 찾아낸 것이다. 남산은 자연과 예술이 조화되어 산 전체가 보물이니 세계에 그 유례가 없다. 남산을 아니 보고 어찌 경주를 보았다 할 것이며, 몇 번 오르고 어찌 남산을 안다고 할 것인가?

남산에는 왕릉 13기, 산성지(山城址) 4개소, 사지(寺址) 147개소, 불상 118체, 탑 96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 672점의 문화유적이 남아 있으며, 이들 문화유적은 보물 13점, 사적 13개소, 중요민속자료 1개소 등 44점이 지정되어 있고, 2000년 12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보호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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