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문화 탐방

덕수궁에서의 하루

풍매화1 2010. 6. 25. 17:59

방문일:2010년 6월 22일 화요일 11시

주차장이 없어 근처 한전 건물에 주차하고 갔는데 두시간정도 머문거 같은데 6200원의 주차료가 나왔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시청에서 내려 가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덕수궁의  역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보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서 왕이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 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삼아 왕이 거처하게 되었다.
1608년 2월에 선조는 행궁의 침전에서 돌아가시고 광해군이 행궁의 서청에서 왕위에 즉위하였다. 광해군 3년(1611)에 행궁을 경운궁 이라 하였다.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에는 화재로 불탔던 중화전이 복구되었다.
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다. 1907년 7월 20일에 일본침략자들의 강압에 의하여 고종이 순종에게 제위를 전위 하자 선제가 거처하는 궁이 되어 덕수궁이라 하였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남족으로난 인화문이었으나 동문이었던 대안(大安)문 앞으로 여러방향의 도로들이 건설되고 환구단이 건립되면서 궁궐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대안문이 실질적인 정문 역할을 하게되엇다

대안문은 크게 편안하다는 뜻이었으나  1906년 수리와 함꼐 대한(大漢)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대한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이다 한양을 수도로 하여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이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말이다

 

 

 

금천교를 지나 걷다보면 중화문에 이르른다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가운데문으로는 임금이 동쪽문으론 문반이 서쪽문으론 무반이 드나들었다

 

 

중화전 앞의 품계석이 놓여진 곳이 조정이며 오른쪽엔 문반이 왼쪽엔 무반이 자리한다

조선시대 문반과 무반을 가리켜 양반이라 칭한것이며 조정의 들은 거친 박석을 깔아 넘어지는것을 방지했으며 햇빛의 반사를 막아 눈부심을 줄이게 하였다

품계석은 중화전에 가까울수록 높은 품계이며 자신의 지위에 맞는 품계석 앞에 서야했다

궁에 늦게 들어가면 뒤에 몰래 서는게 아니라 자기 자리를 찾아가야했으니 망신 안 당하려면 시간 맞춰 등청해야했을것이다..ㅎㅎ

 중화전 내부에는 왕이 앉는 자리인 용상과 일월오악도가 그려진 병풍이 있다

여기서 잠깐! 왕의 얼굴-용안  왕의 식사-수라  왕의 변-매화  왕의변기- 매화틀이며 왕이 행차시 신하가 매화틀을 가지고 다녔으며 왕이 볼일을 보고나면 비단천으로 닦아드렷다고 하니 조선시대 왕은 볼일도 혼자 못 보고 얼마나 불편했을까...

중화전 천장에는 용 두마리가 수놓아져 있다 경복궁의 근정전에도 있으니 놓치지 말고 보시길..

 

 중화전의 문살은 황금색이다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 창호를 사용해 황궁임을 암시한것이다

 

큰 향로 모양의 청동솥으로 정이라 부른다 다리는 셋 손잡이가 두개 달려 있으며 향로처럼 생겼지만 왕의 권위와 다스리는지역의 범위를 상징한다

고대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하늘에 복을 비는 뜻을 담고 있다

 

하월대에 놓여 있는 드므

무시무시하게 생긴 화마,불귀신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치라는 주술의 의미가 담긴것으로목재가 대부분인 궁궐 전각에 오늘날 소화기 역할을 한다

실제 불끄는데 사용하기도 했다는데 무거운 솥에 물한번 떠서 나르려면 그시간에 이미 전각을 다 태웠을것 같다

 다른 궁에 있는 드므와 다른점은 만세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것이다

중국의 천자를 위해서 사용되었던 만세는 조선에서 사용할수 없었지만 대한제국의 출범과 함께 황제국의 격을 갖춘 독수궁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할수 있었다

석조전은 고종황제가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0년부터 1910년에 걸쳐 지은 서양식 석조건물이다

1층은 접견실로 2층은 황제가 거쳐하는 침실과 여러용도의 방으로 구성되었다

재료는 서양처럼 대리석이 아닌 우리나라의 화강암을 이용해 지어졌다 현재 석조전은 보수공사중이라 들어가 볼수 없고 별관은 덕수궁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별도의 입장료를 지불해야한다 

 

 즉조당(오른쪽) 과 준명당(왼쪽)

6월부터 보수공사가 들어가 가까이서 볼수 없었다

준명당은1916년 고종황제가 딸인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해 유치원 건물로 사용햇던곳이기도 하다

즉조당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왕이된 인조의 즉위식을 올렸던곳이다

 석어당,왕이 업무를 보던 편전으로 이층으로 되어 있어 아래의 사진과 같이 왼편 방에 연결된 게단을 통해 올라갈수 있으나 관람객이 들어가 볼수는 없었다

단청이 안 칠해진게 특징이며 아주 오래되어 보이지만 1904년 대화재후 함께 복원한 건물이다

 

우리나라 전통한옥의 특징인 들어열개문 이러한 문의 구조를 갖고 있어 다양한 용도로의 활용이 가능했다

 

 정관헌 고종이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에게 부탁하여 1900년에 지은 건물이다 서양식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철제 난간에는 우리나라 전통문양인 박쥐와 사슴등이 새겨져잇다

이곳에서 고종은 세자와 함께 음악도 듣고 커피도 마셨다 고종은 아관파천때에 러시아공사관에서 처음 커피를 맛본후 그 맛을 잊지 못해 커피를 자주 마셨는데 1898년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된 김홍륙이 앙심을 품고 고종황제가 마실 커피에 독을 탄 사건이 있었다 다행이 고종은 커피맛이 이상하다며 뱉어서 목숨을 건졌지만 함께 마셨던 세자는 독때문에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고 한다

커피는 일반 백성들에게 보급된뒤 서양에서 들어온 탕국이라 하여 양탕국이라 불렷다  커피의 색깔과 맛이 한의원에서 다려주는 흑갈색의 한약과 비슷하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덕홍전으오 외국사신들을 맞이하는데 이용되었다

안은 하나의 공간으로 지어졌으며 서양식 샹들리에가 달려 있다

 

 

 황제의 침전인 함녕전  1904년 덕수궁 대화재의 진원지가 이곳 함녕전 아궁이라고 한다

당시 일본측 언론에선 온돌을 수리한후 말리는과정에서 불을 잘못 때어 나무기둥에 불이 옮겨붙었다고하나 근거가 확실치 않아 방화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1897년에 고종의 침전과 각부처를 연결하는 전화가 설치되었는데 함녕전 대청마루에 전화기가 설치되자 고종은 대신들에게 전화로 지시를 내리곤했다 이 전화를 대청전화라 했는데 대청전화덕분에 김구가 사형바로 직전 목숨을 건진 일화가 뱀범 일지에 실려있다 고종이 김구의 사형집행 서류를 검토하던중 형집행 직전에  전화로 사형집행정지 명령을 내려 목숨을 구햇다는것이다

덕수궁의 마지막 코스인 광명문

본래 함녕전으로 들어가려면 이문을 지나 가야했는데 지금은 흥천사종과 자격루 신기전을 전시해 놓아 문처럼 보이지도 않고 있습니다

평일엔 11시부터 주말엔 10시부터 덕수궁 해설시간이 있습니다

저도 해설사님 해설을 듣고자 11시에 기다렸다 동행했는데 노인복지회관에서 단체로 오신 어르신들이 힘들어하신다하여 자세한 설명을 듣지못한게 아쉽습니다

집에 와서 다른 책과 덕수궁 안내책자 보면서 약간의 해설을 남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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