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문화 탐방

여주기행

풍매화1 2007. 7. 17. 18:23

세종대왕

조선왕조 500년사에서 치적이 가장 뛰어난 왕을 들라면 단연 세종이다. 재위 32년에 남긴 업적은 천문.과학 기기의 발명과  정비, 악기.악보의 개조와 정리를 비롯해 정치.경제.문화.국방.교육 등 다방면에서 역대 왕의 모범이 된다. 21세기의 문턱에서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 임을 공인받은 한글 창제가 대표적인 예이다. 집현전을 운영하여 당대의 학자들을 대거 배출하였으니 모두가 세종의 치적에 더해진다. 대개 세종대의 정치를 찬란한 유교정치,문화가 꽃핀시절이라 한다..

용비어천가,농사직설,의방유취 등 수많은 책의 편찬과 세제개혁으로 농사에 힘썼으며, 일본 쓰시마 정벌, 북진개척으로 영토확장을 꾀하기도 했다.

한글을 창제하여 널리 알리려고 할때도 한문을 선호하고 한글을 업신여기는 사대주의 학자들이 적지않아 여러 번 반대하는 상소를 받는다. 그때 마다 세종은 “ 우리글을 만드는 것은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인데 뭐가 나쁘단 말이냐” 고 단호히 물리치며 의지를 꺾지 않았다. 세종이 32년간의 치적을 마무리짓고 영면에 든 것은 왕의 나이 54세 때이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아들이며 원경왕후 민씨 소생으로 1397 4 10일에 한양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도, 자는 원정이다.

 

위대한 과학기술을 꽃피운 시기

세종은 정초를 우두머리로 이순지의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지식,장영실의 뛰어난 손기술을 이용하여 많은 과학발명품을 만들어 냈다. 세사람이 힘을 합쳐 가장 먼저만든 것이 혼천의 였다. 혼천의 는 천체의 운행과 별의 위치를 측정하는 기구 였는데, 나중에는 여기에 시계 장치를 첨가하여 천체시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 뒤에 만든 것이 해시계였다. 해시계는 솥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 앙부일구와 요즘의 손목시계 처럼 가지고 다니는 작은 크기의 정남일구가 있었다. 하지만 해시계는 해의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기 때 문에 흐린 날이나 밤에는 시계 역할을 하지 못 하였다. 그런 한계를 보충해 주는 것이 바로 물시계였다. 물시계는 낮과 밤에 관계없이 늘 일정하고 정확한 시간을 알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물시계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자격루. 자격루란스스로 두드리는 물방울이라는 뜻인데. 물방울이 떨어져 종,,징을 자동으로 쳐서 시간을 알리는 장치였다.

이 외에도 강수량을 측정하는 측우기가 만들어 졌고, 천체의 모양을 본떠 만든 혼의 와 천문관측대인 간의대 등 많은 과학발명품들이 함께 만들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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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

대표적인 천체관측기구.복잡한 중국의 기구를 단순화해서 별들의 위치를 잴 수 있다.

 

혼천의

천체의 운행과 위치,그리고 적도 좌표를 관찰하는 천체 관측 기구.

동력 장치를 이용해서 천체의 움직임을 보여 주는 동시에, 시간을 알려 주는 시계 구실도 했다.

 

여기서 잠깐!

임금이 천체의 변화를 살펴 백성에게 시간을 알리는 것은 임금의 중요한 역할이자 임금의 권위를 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했다. 동시에 일식 같은 재앙이 언제 일어날지 정확하게 알려 주기도 하며, 제사를 지낼 시간이나 농사를 짓는 때 를 알려주기도 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하늘의 모습을 (하늘의 적도 부근을 세로로 12대 구역으로 나눈 단위) 에 따라 늘어 놓은 별자리 그림

 

조금 더 알기!!

우리 천문학이 왜 필요했을까..?

조선왕조는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나라를 세웠다. 조선왕조는 나라의 체통을 세워서 백성으로부터 지지를 얻고자 했다. 그때 마침 고구려 때의 천문도를 바치는 사람이 있었다. 예로부터 임금이 될 권리는 하늘로부터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천문도는 새왕조의 임금과 신하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래서 이 천문도를 약간 고쳐서 검고 아름다운 돌에 새겼다. 이것이 바로 천상열차분야지도 라는 천문도 이다.

 

맑은 날에는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보고요

 해시계는 해의 그림자 방향을 재서 시간을 알아내는 도구이다.

 해시계를 만들려면 그림자 막대를 수직으로 세우고 남북방향을 정확하게 알아내야 한다.앙부일구,현주일구,천평일구,정남일구 등이 있다.

앙부일구

위로 열려있는 가마솥 모양의 해시계란 뜻이다. 다른 나라에는 없는 조선의 독특한 발명품이다.세종 시대에는 글을 읽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십이지 동물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시침은 북극을 향해 세워져 있다. 좌우로 움직이는 시침의 그림자로는 시간을, 위아래로 움직이는 그림자로는 계절을 알 수 있다.

세종은 이 앙부일구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설치해서, 모든 백성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다

 

흐린날에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보지요.

 

물시계-자격루

 

 자격루는 물의 높이를 재서 시간을 측정하고,종을 울려 시간을 알리는 물시계이다. 이 시계는 나무 인형이 종,,징을 쳐서 각각 시,,점을 알리고 시를 알리는 십이지 팻말을 보여 시의 경과를 자동적으로 알려준다.

지금국보 제 229호로 되어있는 자격루는 중종때 다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예전처럼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지는 못한다.

 

밤에는 별시계인 일성정시의를 보아요!

 해와 별로 시간을 재는 기구.낮의 해의 위치나 밤의 북극성의 위치를 정밀하게 재서 시간을 잴수 있다.

 

여기서 잠깐!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시계를 사용했을까.?

* 옛날에는 농사짓기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 씨를뿌리고 수확하는 데 정확한 절기와 시간을 알아야 한다.

* 종묘에서 지내는 왕실 제사에서는 정확한 시간에 제사를 지내야 했다.

*국경지역이나 군대에서 작전을 할 때 공격시간을 서로 알아보기 위해 사용했다.

 

이밖에도..

측우기

 비가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를 재는 기구. 서울과 지방에 널리 설치해서 강우량을 정확하게 기록했다. 덕분에 농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규표

춘분,하지,추분,동지 등과 절기를 배열해 좋고, 막대의 그림자가 가리키도록 해 놓았다. 규포를 통해 1년이 정확히 며칠인가와 24절기를 알수 있었다.

 

수표

 세종 때 홍수와 가뭄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래서 강우량을 재는 측우기와 함께 강물의 양을 재는 기구또한 필요했다.수표는 하천의 수위를 재는 기구로, 한강와 청계천에 설치되었다.

 

 신분의 장벽을 뛰어넘은 조선 초기의 천재 과학자 장 영실

 

 아버지는 중국사람이고  어머니는 천한 기생으로, 태어나자마자 관청의 노비가 되었다. 그러나 과학적 재능을 타고나 어려서부터 제철, 성 쌓기, 농기구와 무기의 제작 등에 솜씨를 뽐낸 끝에 세종에게까지 인정 받아 중국에서 선진과학을 익힐 수 있었다..세종은 장영실의 노예신분을 거두고 벼슬을 내렸다. 이천과 함께 간의대 건설을 시작했고, 각종 천문의기 제작을 감독 했다. 물시계인 자격루,금속활자 갑인자의 주조, 대간의 .소간의 ,현주일구, 앙부일구등의 해시계, 일성정시의, 태양의 고도를 측정하는 규표, 자동물시계이자 천체시계인 옥루를 잇달아 만들었다. 1441년 세계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가 없었다면 세종 대왕 때 이루어진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적 업적도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왕릉 가운데 가장 터가 좋은곳, 영릉
 

 

세종대왕의 능은 처음에 아버지 태종(이방원)이 잠들어 있는 경기도 광주 헌인릉(지금의 강남구 세곡동)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능선에 있었다.
살아있을 때 효자였던 세종대왕은 죽어서도 아버지 겉에 묻히고 싶어 했다.
그래서 1446년(세종28년), 부인인 소헌 왕후가 죽자 광주 헌인릉 서쪽에 능을 만들었다.  그 후 4년 뒤인 1450년, 세종대왕 자신이 죽자 평소 유언대로 소헌 왕후와 함께 묻혔다.  그러나, 터가 음습해 왕릉으로는 좋지 않다는 이유로 예종 때에 지금의 영릉으로 옮기게 된다..
왕릉이 한양에서 100리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었지만 뱃길로 가면 반나절 길이라고 주장하여 이곳으로 이장 하였다 한다.
영능의 능제는 조선 전기 묘제의 기본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상례에 따라 분묘
시설을 만들었는데,  무덤의 크기와 상석, 혼유석, 장면석등 기타 석물에 대해서도
상례에 따라 능을 조성 하였다.  세종 대왕 능터를 찾을 때, 비가 많이 내렸으나, 비에 젖지 않은 땅이 있어서 그 자리에 영릉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홍살문 : 임금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능 앞은 성스런 곳이니 경건한 몸가짐을 하라는 표시임.
* 혼유석 : 죽은 영혼이 나와서 노는 장소.
* 장명등 : 불을 밝혀 악귀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한 석등(상징적인 석등).
* 문인석과 무인석 : 죽어서도 신하들의 인사를 받으라는 뜻으로 세운 석상.

 

 

 

 

세종대왕 일대기  

 


1397년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다.
1418년 조선의 4대 임금이 되다.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하다.
1421년 장영실을 만나 여러 과학 기기를 만들도록 하다.
1429년 <농사직설>을 편찬하여 농민들을 돕다.
1443년 6진을 설치하여 국경을 확정하다.
1442년 측우기를 발명케 하다.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하다.
1444년 성능이 뛰어난 화포를 제작하다.
1450년 재위 32년 만에 승하하다.

 

세종대왕이 지은 책들

ㅇ 농사직설 :
   1429년, 어떤 환경에서 어떤 곡식을 재배하면 좋은지 농민들이 알기 쉽게 쓴
    책이다.  지역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실어 놓았다.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대왕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ㅇ 용비어천가
   한글로 엮은 최초의 책으로 조선 건국의 유래가 유구함과 그 조상들의 덕을
   칭송하고 있다.  태조의 창업이 하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밝히고, 후세의 왕들
   에게 경계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ㅇ 삼강행실도
   나라에 충성한 사람, 부모에게 효도한 사람, 남편을 공경한 사람 등의 이야기
   105편이 실려 있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내용이 끝날 때마다 그림을
   곁들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  신  륵  사  ]

 

 

▣ 위    치 : 경기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282번지

 

  신륵사는 여주읍에서 동북쪽     으로 약 2.5km 정도 떨어진 남     한강 상류 봉미산 기슭에 있는 오    래된 전통 사찰로서,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나옹대     사가 입적한 후 고려 우왕2년에     크게 중건된 유서 깊은 절입니다.     이 절은 강가   쪽 너른 바위 위     에 벽돌로    쌓은 다층 전탑이 있    어서 고려 때부터 '벽절' 이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의 능이 여주로 옮겨지면서 왕실의 원찰(세종대왕과 소원왕후의 극락왕생을 기도하는 절)이 되어 잠시 '보은사'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역사가 깊고 규모도 웅장하며 주위의 경관도 뛰어난 사찰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7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 신륵사 이름에 얽힌 설화 』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자주 용마가 나타나는데 매우 거칠고 사나워 누구도 다룰 수가 없었는데 신륵사 인당대사가 나서 신력으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다는 설이 있고, 또 한가지는 나옹선사가 사나운 용마에게 굴레를 씌워 용마를 막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늑(勒)'자가 말을 통제하고 다스린다는 뜻이니 신력으로 말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   조사당 : 보물 제180호

 

    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스님(고승)     의 초상화를 모셔놓은건물입니다.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단 뒷벽 중앙에 지공스님, 그     좌우에는 나옹선사와 무학대사의 영정을 모    시고 있습니다.

    조사당의 역할은 옛날 사대부 집안의 사당    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조선 전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앞면 1칸 옆면 2칸으로 세웠고 , 지붕은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입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다포 양식이라고 합니다. 앞면은 6짝의 문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게 하고, 옆면은 앞 1칸만 문을 달아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가운데 기둥을 세우지 않아 대들보가 없는 것이 이 건물의 특색이며 규모는 작지만 균형이 잘 잡힌 아담한 건물입니다.



♣   다층석탑 : 보물 제 225호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재질이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대리석이 거의    나지 않아 옛날에는 준보석으로 여겨질 만큼 아주 귀한     석재였습 니다. 형식은 사각형의 일반형 석탑에 기단부를     2단으로 구성하고 그 위에 여러 층을 거듭해 얹은 탑신     부를 받고 있습니다. 신라나 고려시대의 양식과 비슷하지    만 조선 초기의 석조공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조   형기법이 있는데, 기단 면석에 비룡문(날아가는 용 무늬),   연화문(연   꽃 무늬), 물결무늬, 구름무늬 등의 조각이 능   숙한 솜씨로   섬세하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탑은 몸돌과 지붕돌을 합쳐 하나의 층을 이루는데 5층이 넘으면 다층 석탑이라고 합니다. 신륵사의 다층석탑은 현재 7층만 남아 있고 윗부분은 손실되었으며 철심이 있는것으로 보아 9층 이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신륵사는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   보제존자 석종 : 보물 제228호 

     나옹선사의 사리탑(부도)은 돌로 만든 종모양      이어서 석종이라 합니다. 사리는 부처님이나 스님      들이 돌아 가신 뒤 화장을 하면 나오는 작은 구슬 모    양의 것을 말하고 부도는 사리함에 사리를 넣어 작     은 탑을 세우는 것을 말하며 '사리탑' 이'라고도 합니    다. 부도는 일종의 스님들의 묘라고 할 수 있지요.

  신륵사 보제존좌석종은 승려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부도에 계단을 마련되어 나옹선사가 부처님에 버금가는 존경 받던 위대한 고승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선사가 양주 회암사 주지스님으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고 밀양 형원사로 가던 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불교에서 스님들의 죽음을 말함)하였는데,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석종을 세웠습니다. 보제존자란 나옹선사를 높여 부르는 존호 입니다.


♣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 : 보물 제231호

  석종 앞에는 매우 아름다운 석등이 있습니다. 팔각 면에 8개의      창이 나 있고 하늘을 나는 선녀(비천상)와 이무기가 조각되어 있어      섬세하고 화려한 모습입니다.

   석등의 재료는 지붕돌과 받침은 화강암이며 화사석(석등의 가운데     에 불을 켜는 돌)은 납석(곱돌)을 사용하였습니다. 고려 말기석등의     대표적인 모습이며, 조선시대에 와서 무덤 앞에 놓이는 장명등의 유     례가 되었습니다.


♣  보제존자 석종비 : 보물 제229호

  보제존자 석종 뒤편에 있는 부도비입니다.  '여흥군 신륵사     보제사리 석종기'로 시작되는 비문은 고려 말 대 문장가였던 이    색이짓고 서예가로 이름 높은 한수가 부드러운 서체인 해서체로    썼다고 합니다. 나옹선사가 살다간 내력과 사상이 기록되어 있     습니다.

    또한, 첫 문장에서 여주의 옛 지명이 '여흥'인 것을 알 수 있습     니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    입니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화려함을 더하고 있습니다.

♣   다층전탑 : 보물 제 226호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합니     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      으로 보이며, 고려시대 전탑은 이 신륵사 다층전탑이 우리     나라에서는 유일합니다. 

     탑은 기단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을 올렸습니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    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      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 같아 보     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 입니다.

    조선 영조 때 다시 세워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강가의 너른 바위 위에 높이 세워져 있어 옛날 황포 돛단배들이 이곳을 지날 때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 역할 즉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  대장각기비 : 보물 제 230호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을 세우는 것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습니다.

     대장각은 대장각을 보관하는 곳인데요, 대장경하면        뭐가 떠오르지요? 그렇습니다. 팔만대장경이 있지요.       이곳에도 대장경이 있었다고 합니다. '가정 이곡'선생이     대장각을 세우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     의 아들 '목은 이색' 선생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      을 추모하고자 제자들과 친분이 있는 스님들과 함께 대     장각을 지었다고 합니다.  고려 우왕 9년(1383)에 세웠     고 '권주'의 글씨로 새긴 것입니다.

  비문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양 옆에 돌기둥은 화강암입니다. 대리석은 화강암보다 약해서 깨지기 쉬운데 오랜 시월의 흔적으로 파손이 심한 상태입니다.

   대장경은 금속 활자본이었는데 조선 초기에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하며 대장각기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만 이곳에 대장각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라지면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문화재이니 우리 문화재를 소중히 다루고 아껴야겠습니다.



 

♣ 범종각

  범종각은 어느 절에서나 볼 수 있는 사찰의 건    축물입니다.

  그 안을 들여다 보면 범종과 북, 목어, 운판이 있     는데 목어는 바다에 사는 생명들에게 부처님의    깨우침을 전하는 도구이며, 운판은 하늘을 나는    짐승(새)에게, 북은 네 발 달린 짐승(가축)에     게, 종은 인간에게 말씀을 전하는 도구입니다

   이 네 가지를 불전사물이라고 합니다.





목어의 전설




옛날 어느 절에 덕 높은 고승이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유독 한 제자만이 계율에 어긋나는 속된 짓도 저지르며 제멋대로였다. 그러다 병에 걸려 죽었는데, 그 업보(業報)로 등에 커다란 나무가 솟아난 물고기로 태어났다. 풍랑이 칠 때마다 나무가 흔들려 피를 흘리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하루는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그 물고기가 슬피 울었다. 스승이 절에 돌아와 전생을 살펴보니 죽은 자신의 제자였다. 가여운 생각에 수륙재(水陸齋-물이나 육지에 사는 미물과 외로운 영혼을 천도하는 법회)를 베풀어 물고기의 몸을 벗어나게 해 주었는데, 그날 밤 꿈에 그 제자가 나타나 " 스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바라건데 저의 등에 난 나무를 베어 저와 같이 생긴 물고기를 만들어 나무막대로 쳐주십시오.  그리고 저의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수행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교훈이 될 것이요, 강이나 바다에 사는 물고기는 해탈할 수 있는 좋은 인연이 될 것입니다."









강월헌에서 시한수 읊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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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옹대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 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강 같이 구름 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마음도 벗어 놓고 산 같이 바다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말없이 살라하네 푸르른 저 산들은 티 없이 살라하네 드높은 저 하늘은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인물 알아보기


나옹선사 (1320-1376)

   고려 말의 뛰어난 고승. 성은 아씨(牙氏), 법호는 나옹이며 당호는 강월헌.

   고려 공민왕의 왕사(왕의 스승)였음. 보제존자로 불리우움.


  지공선사  인도의 승려로 나옹선사의 스승


  무학대사』(1327-1405)

   나옹선사 제자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 성은 박씨 호는 무학, 당호는 계월     헌


목은 이색』(1328-1396)

     고려말의 유명한 삼은三隱중 한 사람으로 호는 목은, 시호는 문정이다.

    가정 이곡의 아들로 태어났다. 1341년<(충혜왕 복위2)성균관시에 합격한 이후    원나라에 가서 성리학의 발전을 꾀하였다. 1377년에는 우왕의 사부가 되었으나    조선이 들어서면서 유배되어지고 이후 석방된 후 이성계의 부름을 끝내 거절하     고 1396년 신륵사에서 죽었다.

     문하에서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    고 저서에 <목은문고>와 <목은 시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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