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릉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무덤. 통일신라시대 원성왕릉으로 추정된다.
원래 이곳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 연못의 원형을 변형하지 않고 왕의 유해를 수면 위에 걸어 안장했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란 이름이 붙었다. 무덤의 형태 및 구조는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완비된 능묘제도를 보여준다. 봉분은 원형의 토분으로 봉분아래 봉토(封土)를 보호하기 위한 둘레돌(호석(護石))이 설치되고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봉분 앞에는 사각형 석상(石床)과 돌사자 두 쌍, 문인석(文人石) 한 쌍, 무인석(武人石) 한 쌍, 화표석(華表石, 화표 : 묘 앞에 세운 문) 한 쌍이 얼굴을 마주 대하고 차례로 늘어서 있는데, 이러한 석조물의 조각과 십이지신상 조각 등은 통일신라시대 무덤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된다.
<삼국사기>에 「원성왕이 재위 14년에 죽으니 유해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했으며, <삼국유사>에는 「원성왕릉은 토함산 동곡사(洞鵠寺)에 있는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崇福寺)로서 최치원이 비문을 쓴 적이 있다」했는데, 괘릉의 인근에 숭복사 터가 있어 원성왕릉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대륭원 내 천마총
1973년 4월 16일 발굴이 시작되어 8월 20일에 발굴되어 발표되기 전까지는 155호 고분으로 불렸다. 장신구류 8,766점, 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 그릇류 226점, 기타 796점으로 모두 1만 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중 일부가 국립경주박물관 별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금관(金冠)과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이다. 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 가운데 금판(金板)이 가장 두꺼우며 금의 성분도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국보 제 188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천마도장니는 천마총 출토품 가운데 세상을 가장 놀라게 한 유품이다. 장니란, 말 양쪽 배에 가리는 가리개로, 흙이나 먼지를 막는 외에 장식물로도 사용되었다. 자작나무 껍데기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누빈 위에 하늘을 나는 천마를 능숙한 솜씨로 그렸는데, 지금까지 회화 자료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고신라의 유일한 미술품이라는 데 큰 뜻이 있다. 이 고분의 명칭을 천마총이라고 한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며, 지금은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있도록 무덤 내부를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다
[출처] 천마총 | 두산백과
첨성대와 안압지 야경은 여름에만 보로 왔었는데 추운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안압지의 야경을 보려고 온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낮에 보면 겨울날 황량했을 안압지가 밤하늘 아래 불빛을 받아 신비로움을 더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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