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7.21
대전 뿌리공원- 옥천 농특산물 축제 - 정지용 생가 -육영수 생가
뿌리공원
뿌리공원은 민과 관이 유기적인 협조체제로 조성된 전국 유일의『효』테마공원으로서 자신의 뿌리를 되찾을 수
있는 성씨별 조형물과 사신도 및 12지지를 형상화한 뿌리 깊은 샘물, 각종행사를 할 수 있는 수변무대, 잔디
광장과 공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팔각정자뿐만 아니라 산림욕장, 자연관찰원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진 체험학습의 산 교육장입니다.
- 성씨상징의 조형물 설치 및 “효”주제 테마공원
- 충효사상 및 주인정신을 함양시키는 교육공원
- 다양한 “가족단위시설 및 이벤트 행사”가 마련된 가족공원
- 천혜의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도심속의 자연공원
뿌리공원내의 족보박물관에서 문화관광해설사님의 해설을 듣고 돌아보면 훨씬 도움이 된다
옥천의 포도 복숭아 농특산물 축제
포도와 복숭아 시식과 포도를 이용한 체험등을 다양하게 할수 있다
포도 떡 만들기 체험
정지용 생가
정지용의 시 세계와 문학사적 의의 : 정지용은 휘문 고보 시절 박팔양 등과 함께 습작지 <요람>을 발간하는 등 일찍부터 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후 1920년대 중반부터 모더니즘 풍의 시를 써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이 무렵에 발표한 작품으로는 '향수'와 식민지 청년의 비애를 그린 '카페 프랑스'같은 작품이 주목된다. 그러나 정작 정지용의 시가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1930년대 이후이다.
1930년대 첫머리부터 그는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여, 김영랑과 함께 순수 서정시의 개척에 힘을 썼다. 그러나 김영랑이 언어의 조탁과 시의 음악성을 고조시키는 일에 힘을 기울인 데 비해, 정지용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표현의 방법을 개척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의 장기로 여겨지는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의 구축, 간결하고 정확한 언어 구사가 바로 그것이거니와, 이를 통해 그는 한국 현대시의 초석을 놓은 시인으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그는 사상적인 면에서도 다양한 변화를 보여 주는데, 한때는 카톨릭 신앙에 기초한 신앙시를 쓰기도 했고, 1930년대 말에는 동양적 은일(隱逸)사상에 기대어 '장수산', '백록담' 같은 시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시적 변모를 보여 주면서도 그의 시는 줄곧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 1930년대 말부터 <문장>지의 심사 위원으로 있으면서 정두진, 박목월, 조지훈, 김한직, 박남수 등 많은 시인들을 문단에 소개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6 25를 전후하여 납북되어 현재 생사를 모른다. 한때 월북 시인으로 분류되어 문학사에서 다루어지지 않았으나 1988년에 해금되었다
향수
넓은 벌 동쪽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곳
그곳이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곳이 참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의 초기시의 하나로서, 1930년대에 지니게 되는 이미지스트의 시풍과는 달리 고향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을 주정적(主情的)으로 노래했다.
그는 충북 옥천(沃川)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도쿄에 유학하던 1923년 경에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공간은 당시의 우리 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며,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보편적인 가족의 모습이다. 그런 뜻에서 이 작품은 특정한 개인의 체험을 넘어서서 한국인이 지닌 향수의 보편적 영상으로 수용될 만하다.
작품은 모두 다섯 부분으로 나뉘는데, 각 부분마다 고향의 모습을 회상하는 연이 먼저 오고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독백이 이어짐으로써 간절한 그리움을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반복의 수법은 무척 단순한 것이지만, 그 어떤 복잡한 기교보다도 절실하게 시인의 심경을 나타내 준다.
다섯 부분의 구성은 순탄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교묘하다. 첫째, 셋째, 다섯째 부분은 포근함과 아름다운 꿈이 서려 있는 고향의 모습이다. 둘째, 넷째 부분은 가난하고 고단한 삶의 모습이 담긴 고향을 보여 준다. 작품 전체는 결국 이 두 가지 빛깔로 채색된 고향의 모습이 차례로 엇갈리면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두가 사랑스럽고 그리운 삶의 원천으로 절실하게 결합하는 데에 바로 시인이 노래하는 향수의 깊은 호소력이 있다
육 영 수 여사 생가지
생애 초기
충청북도 옥천에서 지역 유지였던 육종관과 이경령의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육종관은 대지주였으며 여러 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육영수는 대지주가의 장녀로 여러 친형제 자매와 이복 형제자매들과 함께 생활했다.
1938년 죽향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배화고등여학교에 입학하였다.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45년 20세 때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에 부임, 가사 과목 교사로 1년3개월간 재직했다.[1]
결혼 생활
1950년 소개로 당시 육군 중령이던 박정희를 만났으며 6·25전쟁중인 1950년 12월 박정희와 결혼했다.[1] 박정희 대통령과의 사이에 근혜, 서영, 지만 등 1남 2녀를 두었다. 아버지 육종관은 그의 결혼을 반대하였으나, 그는 어머니 이경령과 함께 충북 옥천집을 나와 박정희의 임지였던 대구에서 하숙하였다.[2]
1963년 부군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영부인으로 청와대로 이주하였다.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공관에 있을 시절 육영수의 주된 관심은 민원 처리였다. 제자이며 6년 동안 영부인실 비서관으로 근무한 정재훈씨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 거리의 여론을 수집하고, 하루 수십통의 민원은 일일이 처리지침을 남겼으며, 특히 억울한 민원현장에는 비서들이 늘 발로 달려가도록 했다”고 전한다.[1]
이러한 관심은 자연히 남편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적극적인 의견 개진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청와대 안의 제1 야당'이라는 별명으로 일컬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육영수와 함께 참모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내 옆에 지독한 야당 총재께서 앉아 계시니 알아서 조심들 합시다."라는 식의 농담을 하기도 했다.[3]실제로 육영수 여사는 남편 박정희 대통령이 1963년에 군정 5년 연장을 미국 대사에게 선언하자 이동원 대사를 불러 남편이 군정 연장을 취소할 것을 설득하도록 도움을 청했다고 전해진다.[1]
또한 육영수는 박정희가 자신과 만나기 전에 이미 결혼후 이혼한 적이 있음을 알면서도 박정희와 결혼했으며 또한 육영수는 한 때 박정희가 자신을 만나기 이전에 얻은 딸인 박재옥을 키워주기도 했다
교양수업
육영수는 정치외교사, 국사, 영어 등 다방면에 걸친 강의를 저명한 대학교 교수들로부터 매주 들음으로써 정치와 사회문제에 새로운 안목을 넓혀나갔다.[1]
사회봉사
육영수는 항상 한복 차림에 단아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소박한 인상을 주었고, 가정에서도 남편에게 성실한 아내였다. 또한 어린이와 보건에 관심이 있어서, 몇 차례 고아원과 보육원에 가서 어린이들의 보건에 대한 정책을 펴보기도 하였다. [4] 《좋은생각》 기사에 따르면 육영수 여사는 간식을 준비했다가 청와대를 지키는 경찰들에게 선물할만큼 따뜻했으며, 자녀들에게 청와대에서 쓰는 물건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산 것이니 종이 한 장도 개인용도로 쓰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자립중심의 사회봉사
육영수는 전국 한센병 환자(나환자)촌을 직접 방문하여 자활사업을 지원하였으며, 1964년 9월부터 베트남에 파병된 파월장병 가족들을 찾아 위로,위문하였다. 또한 풍수해 현장에 비를 맞으며 달려가 재난당한 사람들을 위문하였다. 1968년 서울대학교에 기숙사 정영사의 설치를 주관했고 1969년 4월 어린이 복지재단인 육영재단을 설립하였으며 어린이날에 맞춰 어린이대공원, 어린이회관의 건립을 주도하였다.[5] 1972년에는 부산 어린이회관을 기공하였다. 육영수는 직접 소년소녀 잡지 ‘어깨동무’를 발간하여 농어촌 어린이에게까지 배포하고, 1973년 불우 청소년과 빈자들을 대상으로 한 직업훈련 기관 정수직업훈련원을 설치하였다. 육영수 여사가 이렇듯 활발한 사회봉사를 한 이유는 직업을 갖도록 하는 직업훈련위주의 사회복지가 빈곤퇴치의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육영수 여사는 빈곤과 소외와 싸워야 했던 한센병 환자들이 자기 힘으로 살도록 돼지와 소를 키우도록 장려하였으며, “진정한 정신을 갖는 인간회복을 내 안에 정립시켜 생활의 자리를 여러분 스스로가 쟁취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숙명처럼 살아온 빈곤과 수모와 질병의 역사를 청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잘못 없이 주위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억울한 일이 생겼을 때는 직접 청와대로 연락해 달라."라고 격려하였다. [1]
1974년 청와대에 초대된 어린이를 따라온 어머니가 입이 많이 돌아간 안면마비 증세임을 본 육영수는 제일 좋은 침술원을 찾아서 그를 입원시켰는데, 3개월 치료 후 아이의 어머니가 귀향할 때는 집에서 고생한 시어머니께 드리라고 옷감 한벌을 손수 챙겨 8월 14일에 보냈다고 한다.[1]
암살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는 박정희 암살 기도 사건으로 인해 문세광에게 암살당했다. 범인 문세광이 쏜 처음 총탄이 빗나가자 범인을 저격하기 위해 경호실장 박종규가 연단에서 뛰쳐나왔고, 박종규를 노린 범인의 총탄에 육영수가 맞은 것이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쏜 총탄은 빗나가 합창석으로 튀어 당시 여고생이었던 장봉화가 사망하였다.[6] 2005년 동아일보는 당시 경호원의 실수로 육영수 여사가 죽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는 보도를 하였다[7] SBS의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직접 사격을 해보는 실험을 해가면서 육영수의 암살사건에 얽힌 의혹들을 풀고자 하였다.
대한민국 측은 육영수 피살 사건을 조총련의 조종에 의한 범죄로 규정했기 때문에 [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적개심과 반공분위기가 훨씬 높아졌다. 반면 일본 측은 이 사건을 문세광 단독 범행으로 규정해서 당시 한일관계가 악화되었다. [9]
2011년 오상운 작가가 출간한 《퍼스트레이디 피격사건》에 의하면 육영수는 박종규의 총에 맞아 서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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